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8월 쿠데타 (문단 편집) === [[소련 해체]] === 한편 일부 공화국들의 독립 소식을 들은 우크라이나가 연방 잔류 의사를 철회하고 8월 24일에 독립을 선포했다.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현 [[조지아]]), [[벨라루스|벨로루시]] 공화국이 독립 대열에 참여했다. 전국의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동상]]과 [[펠릭스 제르진스키|제르진스키]] 동상이 박살났으며 공산당 건물은 완전히 포위당했다. 여러 공화국들도 앞을 다투어 공산당을 불법화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카자흐스탄]], 러시아 등은 소련 잔류 의사를 표명했지만 뭐 결과는 모두가 [[소련 해체|잘 알다시피]]... 그리고 이들 국가들도 다른 공화국들의 소련 이탈을 보고 결국 다 빠져나갔다. [[파일:attachment/소련 보수파 쿠데타/fallofrenin.jpg]] 9월 4일, 소련 인민대표대회는 소련을 느슨한 주권국 연방 형태로 재편하기로 결정했으며 동시에 신헌법 제정 때까지의 과도체제를 출범토록 하는 제도적인 근거를 마련했다. 새 연방을 구성하게 될 과도체제로는 기존의 연방최고회의를 상원과 하원 격에 해당하는 연방위원회와 공화국위원회로 양분하였다. 과도 연방정부에 관한 결의안은 새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연방대통령과 각 공화국 최고 지도자들로 구성된 집단 지도체제인 국가 평의회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했다. 9월 5일 ABC 통신은 고르바초프, 옐친을 데리고 미국 시민들과 대담을 가졌는데 몰락하는 소련의 위상을 상징하듯이 매우 초라한 모습을 보였다. ||[[피터 제닝스]](진행자): 많은 사람들이 내게 두 분 사이가 어떤지 물어보라고 요청하시더군요. 옐친 대통령: 고르바초프는 나의 정치적 생명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나는 그가 소련 대통령으로써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 한때는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했지만 지금은 아주 쉽습니다. 둘 사이의 많은 어려움들이 이제는 다 지나갔습니다. (중략) 질문1: 공산주의 체제 국가가 계속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고르바초프 대통령: 우리가 경험한 역사를 통해 공산주의는 실패한 것이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소련인들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교훈이 될 것입니다. 옐친 대통령: 공산주의는 미사여구로 꾸며진 유토피아적인 발상들입니다. 다른 공산국가들도 차차 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질문2: 나는 지난 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KAL 007기 폭발사고]] 희생자 유족회 회장입니다. 269명 희생자들의 사체를 반환하거나 보상할 용의는 없습니까? 옐친 대통령: 유족회와 협조할 용의가 있으며 어떤 어려움이든 도울 준비가 돼 있습니다. 질문 3: 현재 쿠바에서는 많은 소련군이 주둔해 있는데 이들은 철수시킬 용의는 없으십니까? (고르바초프와 옐친 모두 당황해서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 하라고 손짓을 했다, 군중의 박장대소) 고르바초프 대통령: 옐친 대통령께서 대답하시죠. 옐친 대통령: 현재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거처럼 쿠바에서도 점진적으로 철수시킬 계획입니다. 질문4: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미국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외국 지도자인데 소련에서는 그렇지 않더군요. 이를 개선할 복안이 있습니까? 고르바초프 대통령: 정치 개혁을 계속해 나가고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언론을 이용하거나 거짓 각본을 짜는 등의 정치술수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자유 진영의 종주국 미국의 시민들 앞에서 공산주의의 실패를 공산주의의 종주국의 수장들이 확인해 주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후 1991년 9월 10일 소련 정부는 대한항공기의 [[블랙박스]]를 사실 회수했음을 밝혀 그동안 블랙박스 찾느라 개고생한 미국과 일본의 뒤통수를 본의 아니게 쳤다. 9월 11일에는 쿠바에서 소련군 철수가 결정되었다. 같은 날 베이커 미 국무장관 등 서방 35개 나라의 외무장관들이 대거 모스크바에 모였다. 목적은 CSCE 유럽안보협력회의 인권회의였지만 실상은 소련의 새 지도부의 의견을 교환하기 위함이었다. 회의에서 고르바초프가 참석하여 소련의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도록 협조해 준 세계 각국의 관심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밝히고 이 같은 각국과 소련간의 연대감은 소련이 더 이상 세계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는 의사를 밝히며 소련에 대한 원조를 요청했다. 9월 22일에는 군사개혁위원회가 설치되어 소련군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실시되었다. 의사당 방어를 지휘한 콘스탄틴 코베츠 장군이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9월 24일에는 옐친이 1992년 1월 1일부로 군사요충지로 외국인에게 철저히 폐쇄되어 있던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개방할 것을 선언했다. 9월 26일에는 대대적인 연로 장성 예편과 소련군을 300만명 선으로 감축하고 국방부는 민간기구로 전환할 것이라는 샤포슈니코프 국방장관의 발표가 있었다. 10월 6일에는 미국의 단거리 핵무기 폐지 방침에 호응하여 소련이 모든 전술 무기의 핵탄두와 핵포탄을 제거하겠다고 발표했다. 1991년 12월 8일 보리스 옐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최고 의장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벨로루시 최고 지도자 [[스타니슬라프 슈시케비치]]가 만나 소비에트 연방의 창설 조약을 소멸하는 것에 합의를 보고 [[독립국가연합]]을 창설함에 따라 소련은 사형선고를 받는다. 고르바초프는 끝까지 해체에 반대했지만 대세를 막을 수 없게 되자 12월 25일 소련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고 1992년 1월 독립국가연합의 출범과 함께 소련은 해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